[제주=nbn시사경제] 권대정 기자
[양동익의 정책칼럼]
대한민국 근세사 100년은 치열한 투쟁의 역사였다. 우리는 이 나라의 역사 속에 치열했던 삶과 희생에 의해 오늘을 만들었다. 세대를 거치며 그 시대의 선조들이 막연히 희망했던 나라를 오늘날 마침내 이루었다고 자부해도 좋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신생 독립국 가운데 정치 사회 경제적으로 모든 면에서 성공한 나라는 우리가 유일하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은 여전히 알 수 없는 암울함으로 이 사회를 물들이고 있다. 독립만 하면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기대가 이념갈등과 정치적 혼란으로 여러 차례 무너져버린 시절도 있었다,
그리고, 민주화가 되면 모두가 공정한 사회에서 살 수 있다고 했던 믿음마저 무너져버린 시간도 있었다. 또한, 배고픔을 이기면 인간다운 삶에 다가갈 수 있다는 선진국의 꿈도 막상 눈앞에 마주하고 보니 별것이 아니라는 허탈감이 우리 사회를 감싸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모두가 바라던 꿈이 허상일수 있다는 공허감이 이 사회를 휘감을 수 있는 위험성에 처해 있는 것이다. 미래비전을 제시하고 국가가 나아가야 할 방향성을 제시하지 못하는 정치권을 바라보며 국민의 불안감은 다양한 사회갈등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분명한 사실은 있다. 우리 민족은 자긍심을 가질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위대하다는 것이다.
신화에 불과한 생각이라고 할지라도 ‘널리 사람을 이롭게 한다.’는 홍익인간의 건국이념이 이 한반도를 정신적으로 지배해 온 것 또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백성의 뜻이 권력의 방향을 발전시켜온 오래된 역사가 이 땅에는 존재하고 있다. 우리의 오래된 역사에는 이러한 ‘전통적 실용주의’가 항상 존재하고 있었으며 고조선은 한나라를 상대로 민족의 정체성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그리고 고구려는 수·당 100만 대군을 상대로 승리했다. 그것은 200만 명의 인구에 불과했던 고구려가 당시 1억이 넘는 중국대륙을 상대한 고대 한국인의 승리였다. 발해의 역사가 그렇고 고려와 조선의 건국이 그랬다.
‘널리 사람을 이롭게 한다.’는 건국이념은 우리 사회의 종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삼국시대에 유래된 불교는 대승불교로 발전하며 국가의 위민사상으로 자리 잡고 이후 한반도에 유입된 다른 종교들이 불교든 유교든 기독교든 공동체 중심사상의 기반이 되었다. 이러한 전통적 인본주의와 실용주의의 본질적 개념은 사상과 종교에 관계없이 융합되어 녹아드는 통합의 그릇을 만들어 온 것이었다.
조선은 성리학의 나라다. 근세 500년의 왕조를 유지한 나라는 동 시대에 유일한 나라였으며 이는 위민정치를 기반으로 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혹자는 1% 정도의 양반과 50% 이상의 노비로 구성된 비정상적인 귀족국가인 것처럼 묘사하는 이도 있다.
한반도는 삼국시대 이래 끝없는 하층민 반란의 역사가 있었고 고려 무신정권 때는 천민출신이 최고의 권력을 차지한 경우도 있었다. 조선의 노비제도가 지금의 관점에서 본다면 비인간적이며 처참한 삶을 강요한 것이 사실이지만 다른 문화권의 노예의 삶과 비교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임진왜란은 일본에게 독특한 한국적 공동체 정서를 경험하게 한다. 근세시대 어느 곳이든 비슷한 백성의 절대종속 관계는 존재했다. 그러나 이 나라는 천민집단을 포함한 일반 백성의 마음이 있었다.
주군 없이 싸웠던 노비와 일반 백성의 저항에 당시 일본군을 당황하게 만든 것은 일대 사건이었다. 조선의 백성은 노비조차 스스로 존재하고 있었다.
중국대륙이 통일을 하고 이민족이 대제국을 세우고 한반도를 침략하였지만 그들이 결국 한반도의 자치를 인정하고 완전한 복속을 한 번도 이루지 못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당나라가 그렇고 이후 명멸한 송, 원, 명, 청나라가 그렇다. 그런 이유로 일제의 침탈은 유구한 우리 역사의 유일무이한 치욕으로 남아 있음이다.
조선의 경국대전은 위대한 법전이다. 태종 때 시작하여 중종에 이르는 250년에 걸쳐 완성되었고 이후 계속해서 보완되어진 동 시대 최고의 법전이었다. 국가통치 원리에서 방법, 그리고 여성과 노비에 대한 인권 등 현대사회가 가지고 있는 법정신의 기본을 대부분 포함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왕실의 연장선에 있었던 대한제국은 1897년에 성립되었다. 이후 1910년에 이루어진 한일병합 조약으로 조선왕조는 사라졌다. 1904년 8월 강제 체결된 한일협정서(제1차 한일협약)와 1906년 3월부터 통감 정치가 본격적으로 이뤄지면서 일본의 경제 침탈은 더욱 노골적으로 진행되었다.
대한제국의 재정, 금융, 화폐 제도를 재편하는 등 식민 지배의 경제적 토대를 마련해 갔다. 이에 국민 스스로 조직적으로 자각하여 일어난 운동이 1907년의 국채보상운동이다.
이러한 국민의식은 한일합방 이후 국가의 주인이 왕실이 아니라 국민 스스로에게 있다는 국민주권의식이 일반화되기 시작하였다. 대한민국 국민은 이러한 민족의 역사를 바탕으로 1919년 3ㆍ1운동을 이끌었던 것이다.
1919년 3ㆍ1운동은 전 국민적 저항운동이었다. 세계사적으로는 간디에서부터 시작되었던 비폭력 저항운동과 맥을 함께하고 있다. 이후 경성에서 선포된 3·1 독립선언에 기초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19년 4월 11일 임시 헌법을 제정하였다. 국호는 '대한민국'으로 하고, 정치 체제는 '민주공화국'으로 하였으며 행정부를 도입하고 입법·행정·사법의 3권 분리 제도를 확립하였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 36년간의 독립운동사는 세계사적인 가치를 함축하고 있으며 이념의 갈등과 열강의 패권다툼 가운데에서도 독립의 국민열망을 지속시켜 마침내 독립을 성취시킨 한 편의 파노라마인 것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완성은 독립된 대한민국의 민주화 성취로 연결되었다.
그러나 사회주의를 표방한 공산주의 국가들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정당화 하였다. 또한 2차 세계대전 이후의 대부분의 신생독립국들은 왕정복귀와 군대를 기반으로 하는 독재를 정당화하였으며 지금도 이러한 독재의 다양한 당위성이 만연해 있어 인류를 위협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고 있다.
이에 반하여 백범 김구 선생은 그 암울한 시대에 ‘나의 소원’을 통해 인류가 너 나 없이 인류평화를 갈구하고 문화로 강국이 되기를 소망했다. 3·1독립선언서는 대한민국의 독립의 이유가 인류공영과 평화를 증진시키기 위한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강조했다.
심지어 독재자와 조국근대화의 아버지라는 양립하는 평가를 받고 있는 박정희 대통령이 만들었다는 국민교육헌장조차도 구절 하나하나가 부족함이 없는 명문이었다. 우리의 독재자는 우리 국민의 역사적 사명과 인류공영에 이바지해야 함을 여기서도 강조하였다. 이 나라의 군사독재의 명분이 역사적 사명과 인류공영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했다는 것은 우리에게 우리의 존재를 알려주는 참으로 아이러니한 위대한 역설이다.
대한민국공화정 성립과 독립운동사, 대한민국 민주화운동사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귀중한 인류자산이다. 이를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추진해야 하고 인류의 기본가치로 인정받을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인류평화와 인류공영을 위한 우리 국민의 지속가능한 목표가 되어야 한다. 지금 이 시점에 우리가 세워야 하는 새로운 목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보수와 진보는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나 존재했다. 보수와 진보는 바른 정치를 향한 공통의 목적과 명분이 있어야 한다. 정치는 보다 바른 것을 위해 나아가는 바른 수단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좌·우 대립의 역사는 프랑스혁명을 계기로 시작되었고 이는 시민파와 왕당파가 좌우로 늘어서 정쟁을 하였던 것이 유래가 된 것이다. 이러한 정치적 이분화의 개념이 확고해 진 것은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극심한 대립이 국내정치에 유입되어 진보와 보수의 이념대결로 혼용되어 정치권력의 수단이 되었다. 행위의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전락해 버렸다는 것은 모든 국민을 이롭게 해야 한다는 정치행위의 최고의 목적성을 상실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우리는 기괴하게 혼용된 진보와 보수의 탈을 벗어야 한다. 평범한 국민에게 자신의 성향을 강요하게 하고 실체도 없이 개념도 없는 막연한 편 가르기를 정치권과 언론이 더 이상 조장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전통적 실용주의’를 누가 얼마나 실현시킬 수 있느냐의 공정한 경쟁이 이루어지는 정치적 환경이 만들어져야 한다는 필요성을 말하고 있다.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가치 정립이 절실하며 우리는 이것을 ‘전통적 실용주의’라는 우리 민족의 잠재력에서 발견해야 하는 것이다.
‘전통적 실용주의의 가치’는
첫째, 자유와 평등에 대한 실용적 발전이다. 진정한 자유는 억압되는 환경적 구조를 깨뜨릴 수 있어야 하고, 평등은 소외되는 사람이 우선되는 정책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자유경제시장에서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며 발전시켜야 하고 낙오된 사람을 보호할 수 있는 사회안전망을 구축하여야 한다. 이는 자유와 평등을 동시에 실현하는 가치의 실현인 것이다.
둘째, 자유민주주의는 인내를 요구한다. 그리고 절차의 정당성을 요구한다. 시민 공청회 과정과 의회의 심의를 통해 적극적으로 국민과 공감할 수 있어야 하며 시간을 두고 충분한 논의가 전제되어야 하는 인내가 요구된다.
셋째,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지속적인 발전이다. 자유민주주의의 지속적인 발전은 국민이 직접 참여할 수 있는 정당 민주주의의 실천적 정치개혁과 지역민이 중심이 되는 지방자치의 실현에 달려있다. 국민의 정치적 참여의 효율적인 방법을 찾는 인류의 노력이 자유민주주의를 인류 보편적 가치로 인식하고 지속가능한 목표로 제시되어야 함을 이른다.
넷째, 인류보편주의에 대한 실현에 있다. 우리민족은 불과 70년 사이에 세계에서 유래 없는 새로운 방식의 성공을 이루었다. 이러한 자긍심은 인류가 공동으로 추구하는 새로운 가치를 만들고 선도해 나가야 하는 책임을 사명감으로 가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대 자유민주주의는 완성된 결과물이 아니다. 이는 인류가 나아가야 할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며 우리는 그 길을 선도할 자격을 만들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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