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nbn시사경제] 권대정 기자
[양동익의 사색]
‘꿈을 꾼다’는 말이 우리말에서는 의도하지 않게 두 가지 의미를 혼용하게 된다. 미래의 희망을 갖는다는 의미와 잠을 자며 꿈을 꾼다는 이미지가 동시에 연상되기 때문이다. 영어에서도 ‘dream’은 ‘희망을 갖다’와 ‘꿈을 꾸다’의 의미를 모두 갖고 있다. 우연일까? 이러한 이미지의 동시성은 꿈과 허상의 의미가 동시에 연상 작용을 일으키고 희망이란 의미가 덧없다는 낙심으로 쉽게 변질되는 원인을 만들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주관과 객관의 차이로 나타날 수도 있다. 자신은 희망을 갖는 것이지만 그러한 희망이 객관적으로는 몽상으로 볼 수 있다는 개연성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문화권에서는 단순히 잠을 자며 ‘꿈을 꾸다’라는 의미와 허무한 ‘몽상을 하다’라는 의미가 혼용되고 ‘희망’, ‘소망’의 표현을 달리하기도 한다.
이렇듯 꿈은 인간의 욕망과 욕심이 함께하면 허망한 망상으로 그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인간에게 꿈은 삶의 동력이 된다. 꿈이 없는 인생은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을 소원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고 바램이라 말하는 이도 있다. 이것이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이 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나 인간이 이러한 꿈을 꾸는 것은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위해 또는 어떻게 라는 정당성의 문제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명예욕이나 이익을 위해 욕망을 품는 것이 꿈을 꾸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Boys, be ambitious(소년들이여, 야망을 가져라)”라는 말이 있다. 삿포로 농학교 교감으로 재직하였던 선교사 윌리엄 S. 클라크의 유명한 말이다. 사람들은 앞에 표현된 선언적 표현에 익숙해 있지만 뒤에 이어진 말에 그의 말이 의미하는 바가 표현돼 있다. “소년들이여, 야망을 가져라, 돈을 위해서도 말고 이기적인 성취를 위해서도 말고, 사람들이 명성이라 부르는 덧없는 것을 위해서도 말고 단지 인간이 갖추어야 할 모든 것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사실 모두가 어린 시절부터 야망이란 단어 하나에만 집중하였다. 젊은 시절 사람이라면 누구나 야망을 가져야 한다는 당위성만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인간이 삶을 살아가면서 생각보다 인간이 스스로를 고정관념에 가둬두는 방법이 단순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우리나라 학교교육의 폐쇄적 구조와 편향된 교육문화가 점철된 병폐가 가져온 결과다. 꼭 교육만의 문제는 아니다. 언론인이 제목만으로 대중을 현혹시키고 또 이것만을 받아들이고 사실을 왜곡하여 인식하는 일반적인 현상을 보면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러한 것들은 어쩌면 소년이 야망만을 이야기 하고 무엇을 위하고 어떻게 야망을 펼쳐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의 기회를 진지하게 갖지 못하는 것들과 같다. 인간이 꿈을 갖는 사실도 마찬가지다. 인류가 마녀라는 단어 하나에 집착하여 ‘마녀사냥’이라는 처참한 역사를 만들기도 하였고 평등이란 구호 하나만으로 사회주의 혁명을 성공하기도 하였다. 물론 민주화라는 구호 하나만으로 군사정권을 극복한 우리의 긍정적인 현대사도 존재한다.
꿈에 대한 또 다른 이야기가 정신세계의 연결이다. 꿈에 나타나는 모든 이야기가 자신의 심리적인 내적 상황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시간을 초월한 인간관계의 연결고리를 만들기도 한다. 만나보지 못한 조상을 마주하기도 하고 돌아가신 이들의 못 다한 이야기를 전하기도 한다. 그리운 이를 꿈속에서 만나기도 하고 자신의 소망을 전하기도 한다. 혹자는 미래에 벌어질 상황을 암시해 주기도 하고 위험을 경고한다고 말한다. 누구도 자신의 꿈을 증명할 수 없지만 수많은 이야기를 남기고 있다. 그것을 과장하기도 하고 이를 신앙처럼 받아들이며 맹신하는 경우도 있다. 잠을 잔다는 사실이 조용히 숙면만을 취하고 칠흑 같은 밤에서 새롭게 깨어나는 아침이 주어지는 것이었다면 인간의 삶은 보다 더 단순하여졌을 수도 있었다. 꿈을 꾸지 않고 숙면을 취한 다음날의 상쾌함은 그러한 모습이 어떠한지 모든 사람이 경험으로 알고 있는 세상이다. 그러나 오묘한 꿈의 세상을 경험하게 하고 매일 밤 인간의 의식의 깊은 곳을 끄집어내고 있는 것이다.
프로이드의 ‘꿈의 해석’은 정신분석학을 대표하며 인간의 무의식을 과학의 세계로 이끌었다. 꿈은 의식되지 않은 심층 의식의 욕구 충족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꿈의 욕구 충족 성격, 꿈의 몽환적 성격, 몽환과 꿈에서 마음의 퇴행 기능, 수면과 운동마비, 꿈에서 전위의 메커니즘, 꿈의 메커니즘과 신경증의 메커니즘 사이의 유사성 등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어디까지나 신경생리학과 신경해부학을 기본으로 삼고 있는 유물론적 자연과학의 범위에 있다. 꿈이 인간의 심리상태를 보여주는 하나의 상징체계로서 심리학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한 셈이다. 심리학은 철학의 한 분야인 인식론에서 시작하여 19세기 후반에 비로소 실험과학으로 독립하였고 복잡한 학문체계를 만들고 있다.
꿈에 대한 역설은 이를 정신분석학적으로 접근하든 심리학적인 복잡한 학문적 체계를 만드는 인간의 모든 활동이든 꿈에 대한 실체의 규명이 오히려 우리를 미궁으로 몰아넣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이것은 과학의 역설이기도 하지만 철학적 사고가 인식론으로 회귀하고 과학의 역설을 설명하는 수단이 되고 있는 것이다. 양자물리학의 출현은 이와 궤를 같이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오묘한 꿈의 세계가 인간의 꿈과 소망을 만드는 원천이 되고 있음은 분명하다. 결국 확신할 수 없는 꿈의 세계가 인간의 삶을 이끌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인간이 우주와 연결되는 작은 실마리를 남기는 것일 수도 있다. 깊은 잠에 빠지는 것이 죽음이라면 죽음은 꿈을 따라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간다는 인간의 소망을 만들고 있다. 불확신성. 이로 인해 인간의 불안함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이러한 불완전성이 갖는 삶의 요구는 인간의 노력을 필요로 하고 있다. 삶의 소망과 삶의 노력은 인간의 불확신성을 떠받치는 수레바퀴가 되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소박한 꿈을 꾼다고 말한다. 가족의 건강과 행복한 삶을 위한 작은 소원 같은 것들이다. 누구나가 바라는 보편적인 바램이 당연한 것이라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감성적으로만 바라본다면 바람직한 작인 소망들이 모이고 큰 소망을 만들어 사회를 이끈다는 보편적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소망이 바람직하다는 것에 대하여 그것을 일일이 나열하지 않더라도 모든 사람은 이것이 무엇인지를 모두가 인지하고 있다. 그러나 그 소박하다는 것도 극히 주관적인 것이어서 인간의 이기심이 작동하면 그 당위성을 장담할 수도 없는 것이다.
꿈을 꾸는 인간이 아름다운 이유는 따뜻함에 있다. 따뜻함은 욕심스런 탐욕의 모습이 아니라 꿈을 가슴에 품는 긍정의 에너지에 있다. 사랑으로 가득한 따뜻한 꿈을 꾸는 세상. 이것은 모든 사람의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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